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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28 14:45:02 |최종수정2010-05-28 14:45:02


#1. 2007년 11월 21일, 아르샤빈의 퇴장

유로 2008 예선 마지막 라운드가 펼쳐진 날. 안도라의 수도 라 벨라에 위치한 에스타디 코무날 스타디움에서는 러시아가 극적인 반전을 위해 홈팀 안도라와 싸우고 있었다. 크로아티아가 E조 1위를 확정한 가운데, 거스 히딩크 감독의 러시아는 2위 자리를 놓고 잉글랜드와 치열한 싸움 중이었다.

상황은 여러 모로 러시아에게 불리했다. 최종전을 앞두고 승점 21점을 챙긴 러시아는 마지막 상대인 조 최하위 안도라를 잡더라도 승점 23점의 잉글랜드가 홈에서 크로아티아와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나설 수 없었다. 본선 진출을 확정한 크로아티아에게 운명을 걸어야 했다. 히딩크 매직도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전반 종료 직전 얻은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히딩크의 애를 태우던 러시아 선수들은 후반 39분에야 골을 터트렸다. 드미트리 시체프가 트로빈스키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하며 골망을 흔든 것이다. 그 사이 잉글랜드에서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크로아티아가 성지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에 3-2로 앞서고 있던 것. 극적인 본선행에 가까워진 러시아는 1점 차의 리드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후반 종료 6분을 남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에이스' 안드리 아르샤빈이 안도라 선수에게 거친 플레이를 가해 곧바로 레드카드를 받은 것이다. 결국 잉글랜드는 크로아티아에 패했고 안도라에 1-0으로 승리한 러시아는 극적으로 본선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본선 행을 기뻐하는 히딩크 감독의 표정 뒤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에이스 아르샤빈이 본선 조별리그 3경기 중 초반 2경기에 나설 수 없는 치명적인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2. 2010년 5월 16일, 이동국의 부상

월드컵을 한달 남긴 5월 10일 소집된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은 엿새 뒤인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에콰도르와 평가전을 치렀다. 국내에서 치르는 마지막 평가전이었던 에콰도르전은 출정식을 겸하고 있었다. 선수의 컨디션 점검과 26인 명단 정리를 위한 테스트 못지 않게 결과가 중요했다. 6만 관중을 모아 놓고 패배를 기록하며 출정식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허정무 감독은 조금은 예상 밖의 선발 라인업을 내놨다. 리그 일정을 마치고 입국한 박지성을 선발로 투입했다. 최전방에는 이동국이 선발 출전했다. 올 시즌 발목과 허벅지에 잔부상을 입었지만 월드컵에 나서겠다는 일념 하에 출전 시간을 조절하며 꾸준히 경기를 소화해왔던 이동국은 소속팀 전북이 AFC 챔피언스리그 일정을 위해 호주로 장거리 원정을 다녀온 터였다. 귀국한 지 이틀째였지만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을 염기훈과 함께 선발 투톱에 세웠다.

이동국은 전반전에 최전방에서 엄청난 활동량을 선 보였다. 좌우 측면으로 넓게 빠져나가며 염기훈의 공격이 빛날 수 있는 조연 역할을 맡았다. ‘부지런하지 못하다’는 허정무 감독의 질책을 이겨내기 위해 지난 6개월 간 활동량을 늘린 그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이동국의 부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12년을 기다린 월드컵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전반전을 마친 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이청용과 교체시켰다. 그러나 이동국은 계속 후반전을 소화했다. 후반 14분에는 김재성의 크로스를 완벽한 타이밍의 슈팅으로 연결하며 날카로움을 선보였다. 하지만 결국 탈이 났다. 이동국은 후반 20분경 허벅지 근육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벤치에 보냈고 허정무 감독은 그제서야 이승렬과 교체시켰다. 정밀 검사 결과 이동국은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을 다쳤고 2주에서 3주 가량의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2006년 무릎 부상으로 좌절해야 했던 이동국이 다시 한번 부상 악몽으로 월드컵에 나설 수 없는 위기를 맞았다.

#3. 2008년 5월 27일, 아르샤빈의 최종엔트리 발탁

유로 2008 본선 진출 후부터 최종 엔트리가 발표된 6개월 여 동안 러시아를 뜨겁게 달군 이슈는 아르샤빈의 대표팀 발탁 여부였다. 아르샤빈은 소속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크가 2007/2008시즌 UEFA컵(현 유로파리그) 우승에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럽 명문 클럽들이 아르샤빈의 기술과 창조성에 주목했고 그의 가치는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그를 유로 2008에 볼 수 있을 지는 확실치 않았다. 예선 최종전 퇴장으로 본선 조별리그 1, 2차전에 출전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유로 2008 본선 진출 확정 후 치른 평가전에서 아르샤빈을 기용하지 않았다. 효용가치가 적은 아르샤빈이 없다는 가정 하에 팀 전력을 만든 것이다. 아르샤빈은 25인 예비 명단에는 포함됐지만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는 순간까지도 발탁 여부가 50대 50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5월 27일, 베이스 캠프인 독일의 로타흐-에게른에서 23인 최종 명단을 발표한 히딩크 감독은 아르샤빈을 포함시켰다. 아르샤빈의 본선행은 논란을 가중시켰다. 일각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결단을 높이 샀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한 경기 밖에 뛸 수 없는 선수를 위해 카드를 한장 버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조별리그 3경기 이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럴 경우 아르샤빈의 효용 가치는 한 경기 용이 아닌 그 이상이 된다. 히딩크의 도박은 맞아 떨어졌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게 1-3으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위기를 맞았던 러시아는 ‘디펜딩 챔피언’ 그리스를 천신만고 끝에 꺾으며 희망을 잡았다. 그리고 스웨덴전에 기다렸던 에이스 아르샤빈이 출격했다. 6개월 간 대표팀 평가전에서 단 1분도 뛰지 않았지만 아르샤빈은 90분 동안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으로 스웨덴 수비를 무너트리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네덜란드와 8강 전에서 아르샤빈의 능력은 빛났다. 그는 1-1 상황이던 연장전에 토르빈스키의 결승골을 도운 뒤 직접 쐐기골을 넣으며 러시아의 3-1 승리에 일등공신이 됐다. 두 경기에 나설 수 없음에도 자신을 선발한 히딩크 감독을 위해 아르샤빈은 강력한 책임감을 보였고 특유의 드리블과 완급조절은 러시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놨다. 히딩크 매직의 화룡정점이었다.

#4. 2010년 5월 31일, 이동국의 운명은?

현재 이동국은 오스트리아 노이스티프트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표팀의 유럽 전훈 멤버 중 유일한 부상자다. 에콰도르전에서 함께 부상을 입은 김재성은 정상 훈련에 복귀했지만 이동국은 여전히 재활치료사인 마이클 쿠이퍼스와 개인 훈련 중이다. 27일 이동국은 팀 훈련에 앞서 70여 분 동안 비공개 특훈을 실시했다. 기존의 러닝과 단순한 볼터치에서 벗어나 패스와 슈팅 훈련을 겸했다. 심박측정기를 차며 체력 상태도 면밀히 체크 받았다.

유럽 도착 후 이동국의 그리스전 출전 여부가 화제가 됐다. 이동국의 부상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고 해도 본선 첫 경기인 그리스전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체력과 경기력의 완전한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아르헨티나전과 나이지리아전에서는 이동국의 한방을 기대해 볼 만하다. 박주영이라는 확실한 공격 자원이 있지만 월드컵이라는 무대는 한 선수의 능력에만 기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유로 2008의 러시아도 그랬다. 스페인전에서 철저히 고립됐던 파블류첸코는 아르샤빈이 돌아오자 자신의 진정한 파괴력을 선보였다. 아직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박주영-이동국 조합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동국의 그리스전 출전 여부가 쟁점이 되면서 허정무 감독의 머리 속도 복잡해지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이동국과 관련한 기사는 그에게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디어에 휘둘리기 싫어하는 허정무 감독은 27일 조금은 불만에 찬 멘트를 남겼다. 그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선수에게 휘둘려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동국은 경기에 뛸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뛸 수 없는 선수에게 미련을 둘 순 없다”라고 말했다. 만일 그것이 허정무 감독의 진심이라면 이동국은 최종엔트리가 결정되는 오는 31일까지 확연히 나아진 몸 상태를 보여야만 23인 명단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승부사에겐 때론 도박도 필요하다. 안정적인 결과만 좇다 보면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동국을 선택하는 것은 허정무 감독이 월드컵에 사용할 한 장의 카드를 버리는 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도박이 성공할 경우엔 대표팀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는 버리는 패가 누군가에게는 판을 뒤집는 결정적인 패가 된다. 그것이 도박이고 매직이다. 과연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 감독처럼 과감한 도박을 할 수 있을까?

글: 서호정 기자
Posted by 메신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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